청야 김민식(캘거리 문협)
로키산맥 산등성이는 하얀 소복의 여인들이 아직도 너울너울 강강술래를 하고 있는데, 오월의 봄비는 대지를 적실 때마다 연두색의 나래가 펄럭인다.
이렇게 상긋한 날에는 자작나무 숲 사이를 무작정 걷는다. 오솔길도 없는 태고의 숲이 좋아 숨을 죽이고 귀만 쫑긋 거리면, 미처 젖지 못한 낙엽들이 발끝을 졸졸 따라다니며 찰팍거리는 소리가 선율을 탄다. 수목사이로 졸졸 흐르는낙수가 리듬을 만들고, 어느새 로빈 새 수컷의 짝짓기 처량한 노래가 사방을 쩌렁거린다. 이미 짝을 이뤄 주고받는 또 다른 로빈 새의 사랑 노래 소리는 천상의 소리인데, 덩달아 까치 까마귀도 설쳐대며 냅다 소리를 지른다.
운이 좋은 날에는 어미 코요테의 우짖는(howling) 쉰 소리에 흩어진 식구들이 낭랑한 화답의 화음을, 봄바람이 실어 나르면 절정에 이른다. 청아한 소리들이 서로 주고받으면서 고요하던 숲속이 점점 요란해 지면, 나는 어느새 영상하나를 떠올린다. 볼레로(라벨) 연주회의 청중이 된다. 자작나무 숲을 스치며 지나는 자연의 소리, 가락들이 춤추는 여인을 부른다. 사방에 널려 쓰러진 고목에 다소곳이 앉은 채 눈을 감고 감상을 한다.
웬만한 교향악단이면 한번쯤은 연주한 경험들이 있어 낯설지 않은데, 크리스토프 에센바흐가 지휘하는 파리관현악단의 연주를 즐겨 감상한다. 현악기의 현을 퉁기는 소리가 피치카토를 타고 들릴 듯 말 듯 작은 북과 함께 아주 여리게(피아니시모) 서두를 시작한다. 단조로운 하나의 리듬이 169번 반복되고 중요 멜로디 2개만이 전 곡을 이끄는 데도 다음을 기다리는 초조함으로 지루하지 않다.
독주이외에는 동일한 선율(unison)의 다장조 전음계적인 기법에 작은북(snare drum)이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이 같은 리듬을 반복 연주하는 매력에 깊이 빠져든다. 25개의 악기를 주고받으며 그 사이로볼레로 리듬이 두 마디 씩 끼어 들어 흥을 더하면 마음은 이미 술집의 원탁 테이블 위에서 홀로 볼레로 춤을 추는 무용수를 떠올리며 카타르시스는 절정에 이른다.
내가 에센바흐를 좋아하는 것은 그의 인생 여정에서 녹아나는 볼레로의 지휘 모습이다. 1940년 태어나자 바로 어머니를 여의고 4살 때 부친마저 별세하는 천애고아로 성장하는 인생, 그 고통을 딛고 피아니스트, 지휘자로 변신하며파리, 휴스톤, 빈 등 세계유수의 지휘자, 음악감독을 거치면서 쌓은 내면의 성숙함을 사랑한다.
15분여의 전 곡이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하나의 크레셴도로 이어지면서 연주할 동안 두 손은 미동도 않고 눈짓, 턱짓으로 지휘를 하다가, 전체 340마디 중 마지막 30여초를 남기고 절정에 이르는 순간 지휘봉을 뻔쩍 들고 마지막 연주를 맺는 장면이 더욱 인상적이다.
피곤할 때나 우울할 때 눈을 감고 들으면 머리가 맑아진다. 매일하는 아침운동 시간에 동영상 설정 속도를 1.25배로 다소 빠르게 맟추고 율동체조를 하면 묘한 습관성이 있어 반복을 하게된다.
훌륭한 문학작품이나 그림, 음악 감상하는 횟수가 늘어난다. 그 속의 은유적인 요소들을 찾아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감상하는 동안 나름대로 해석하는 자유가 있어 흥미를 더한다.
노년의 인생 ― 이민인생을 수많은 삶의 부침(浮沈)을 견디며 오늘도 이 길을 운명처럼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 나의 가슴속에는 인생의 작은 북 하나가 나를 흔들리지 않게, 삶의 일탈이 없도록 열심히 두드려 주는 이가 있는 것을깨닫는다. 순간마다 사유와 창조의 악기들을 하나 둘씩 붙여서 연주하게하고, 지친 몸으로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면 두 손을 번쩍 들며 마감을 하는 위대한 나의 어머니와 예수가 있어 오늘 하루도 행복하다.
이밤에 하루, 일주일 일년, 남은여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볼레로처럼 크레센도(cresendo)로 살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