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이여,
12월 초하루 화창한 날씨입니다. 커피 점 창가, 모처럼 혼자만의 망중유한입니다.
진한 커피향이 입가에 오래 머물며 그리움의 여운을 몰고 오더니, 온 몸에서 가실 줄을 모릅니다. 그리움의 향기가 또 다른 향을 피우고 잉태하며 회귀하고 있습니다. ‘오늘모여 찬송함은 형제자매 즐거움 .....신랑신부 이 두 사람 한 몸 되기 원하며.....’ 찬송가를 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노래를 잘 하는 덕분으로 결혼식에서 몇 번 인가 축가를 불렀던 고운 목소리가 그대로 귓전을 타고 들립니다. 햇살의 열기 때문인지, 따사했던 그리움의 체온 때문인지 왠지 주절 없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합니다.
이제 누이에게 편지를 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민생활의 삶이, 2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매우 힘들고 버겁습니다. 삶의 업보라고 생각하기엔 너무나 가혹합니다.
40대 중반을 훌쩍 넘긴 나이에 가족이민을 결심한 사실을 안 누이의 원성이 지금도 귀에 생생합니다. “오빠 있는 돈 가지고 먹고 살지 뭐 하러 이민 가” 직장을 퇴직하고 하던 사업도 여의치 않아 수중에 가진 재산이라곤 덜렁 아파트 한 채 밖에는 없어, 당장 생활하기도 힘이 들었던 때이었음을 이제야 고백합니다. 음악, 미술전공을 원하는 자녀들, 장남의 중압감, 어디를 둘러보아도, 삶이 막막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이민을 가면 마치 죽음의 오지에 가는 것처럼 공항에선 가족 친지간엔 온통 울음바다의 광경을 종종 보곤 하던 시절이었으니, 가족들의 놀램과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이제야 이해할 것 같습니다.
내가 떠난 자리엔, 서울에 살던 누이가 부산의 누님을 대신해서 동생들, 병환의 어머니를 돌보느라 힘들었던 누이의 삶들이 마구 생각납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10년 터울인 서울대철학과를 졸업한 매제와 지적수준을 맞추려는 욕심 때문이었습니까? 쉰이 넘은 늦깎이 나이에 누이는 방송통신대학을 졸업한 후, 붓글씨에 심취하고,몇 차례 국가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고는, 명동 도심의 백화점의 문화교실 서예지도 선생을 하면서 대학원 진학을 꿈꾸던 시절이었습니다. 동네 보수교단 큰 교회 권사로, 동분서주하며 초인적인 활동을 하던 해로 기억됩니다. 2000년 늦가을, 어머니의 병환이 위독하시다는 전갈에, 가까스로 한국행 비행기 표를 구하고, 생전의 어머니를 만나야 하는 절박함 때문에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서울 역에서의 헐레벌떡 만남이, 이민 후 7년만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오빠가 온다는 말에 엄마가 회복 됐어, 그런데 오빠 옷차림이 그게 뭐야!” 화가 난 듯 만나자마자 쩌렁한 목소리였습니다. 백화점으로 직행해서 여름, 겨울 양복 두 벌을 사 주면서, “오빠 옷 갈아입고 들어가자” 그제야 제정신의 말끔한 양복차림으로 병상의 어머니를 뵐 수 있었습니다. 기뻐하시는 어머니를 뵐 수 있었습니다. 바로 엊그제 같은데 노년의 애절한 그리움은 생생함의 기억으로 소생하는가봅니다.
사랑하는 누이여!
나는 이듬해 그 겨울양복을 세탁해서 2001년 12월 어머니 장례식, 2007년 7월 아들 결혼식, 2015년 6월 딸 결혼식에서는 여름양복을 세탁해서 입었습니다. 가족 친지들이 궁상스러움에 안쓰러워했지만, 가족 경조사에 누이를 마음에 품지 않고는 참석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유방암으로 15년여 투병 중이라는 사실을 아들 결혼식 때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해 겨울, 나는 누이의 고통, 부산누님의 병환 등이 나의 슬픔이 되어 의사가 유언장을 준비하라는 조언을 할 정도로 병원에서 호되게 우울증 병치레를 했습니다.
그 후 몇 번의 서울방문 때마다 누이의 집에서 며칠씩 머무르곤 했는데, 병색이 호전되는 듯 여전히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깨끗하게 정돈된 컴퓨터 방에 식사며 빨래며 정성껏 대접받았지만 마음이 찢어질 것만 아픔에, 떠날 땐 버스정류장 한 모퉁이에서 남몰래 엉엉 울곤 했습니다. 금년 8월 누이가 별세한 며칠 후, 납골당에서 누이를 만나고, 부산누님의 집에서 들었습니다. 인터넷 온라인 성경타자쓰기에 누님은 8번을, 누이는 11번의 신구약을 끝내고는, 그 아픈 몸으로 손위매제의 백내장 수술과 허리수술을 같이 따라다니며 완전히 치료하고 며칠 후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 오빠가 보고 싶다는 이야기, 다니던 교회 절친한 교인들조차도 죽음 직전까지 유방암의 병세를 전혀 몰랐다는 등등, 밤늦도록 듣고는 가슴이 무척 아팠습니다.
3년 전 만났을 때 “오빠, 나는 요즘 매일 새벽기도회는 20분을 걸어 다녀”
병고 중에도 남편을 존경받는 훌륭한 장로로 은퇴시키고 아들 결혼시켜 두 손자 손녀를 보고서야 숨을 거두었습니다. 육신은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영혼은 이 땅에 감동과 아름다음으로 부활해서 가족들, 친지들의 삶을 격려하고 보살피고 있음을 믿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누이여! 누님, 어머니 같은 누이여!
부디 저 천국에서 편안히 계시게 .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됩니다.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것이 나타났습니다.’ (고린도 후서 5장 17절)